비 오는 날의 전우애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어제 개장한 망원 야외 수영장. 29일 개장을 했지요. 뛰러 나가는 길목에 있어 준비 과정을 보게 됩니다. 27일 부터 조금씩 물을 채우기 시작해 드디어 개장을 했구나. 물속에 들어간 이는 없고 어린 아가씨들은 선탠만 하고 있었습니다. 드레스 코드가 명확한 지 모두가 비키니만 입었었죠. 이 짧은 여름을 위해 그렇게 준비했구나. 복근을 만들기 위한 그간의 싯업. 치즈 크러스트 피자 대신 크런치. 맥주 맛있는 것 모를 이 누가 있겠냐만, 맥주도 치킨도 참고 견뎌 냈구나. 최신 비키니의 트랜드는 이러했구나. SS시즌 칼라 코드는 이런 거구나. 날씨는 참 컸습니다. 아니 맑았습니다.


조그만 감동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흰 밀가루와 흰 설탕 세로토닌의 유혹에 맞서 당당히 맞서고 있다. 이건 현대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전우애를 느끼며 내일을 불사르리. 


오늘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아뿔싸. 열흘 연속 출석부에 도장을 찍었 건만 오늘은 결석인가. 어제 했던 결심들이 스쳐 지났습니다. 누군가는 퍽퍽한 닭가슴살을 먹고 지금도 변비로 고생하고 있을텐데. 그래도 빗소리는 너무나 거창합니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책을 읽어도 어제의 여전우들이 스쳐 지나더군요. 


내년에는 웃통벗고 뛰자. 런닝셔츠 입은 듯한 우스꽝스런 싱글렛 자국 대신에 까만 상체를 만들어야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한강에서 저렇게 뛰면 한강 홀딱남으로 인터넷에 올라올 겁니다.

 

빗속에 뛰러 나갔습니다. 그놈의 전우애 때문에. 아이폰은 랩으로 둘둘 말고. 제일 만만한 이어폰을 꺼내 끼고는 뛰기 시작했습니다. 


망원지구 수영장을 조금 넘으면 한강 물놀이장이 나오지요. 높이를 한강과 맞추어 마치 한강에서 수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노렸다는 이제는 잊혀진 이름 오세훈의 빛나는 열정의 결과물. 오픈 다음 날에 물이 차오르고, 상류는 방류를 할 터이니 존재감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울 그 물놀이장. 모두가 노할 때 예스하며 그 물놀이장을 만들었겠지요. 그곳을 스쳐 지나면 3킬로 지점입니다. 이 넓은 곳에 아무도 없으니 사치스런 기분이 듭니다. 차가웠던 몸도 달구어졌고, 빗속에 가쁜 호흡도 안정되었습니다.


찰박찰박 첨벙첨벙. 재미없었던 어느 소설을 생각하며, 나라면 이렇게 풀어 나갔을텐데 문학비평을 시작합니다. 달리기를 할 때는 새털같이 가벼운 온갖 세상 잡사를 꼬치꼬치 따지게 됩니다. 최근에는 소설가 황정은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뛰고 있지요. 이 아가씨 슬쩍 잠오는 톤으로 자신의 소설처럼 나긋나긋 말하는데, 듣고 있으면 하는 일 없는 동아리방에서 맥주 한 잔 하는 기분을 들게 만듭니다.


반환점을 돌아 나오니 러너들이 눈에 뜨입니다. 찰나의 순간에 스쳐지나지만 공감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비키니 아가씨들의 노고에 비한다면 이 짧은 폭우가 무어 장애란 말이냐. 우리 허들을 뛰어 넘읍시다. 스쳐 가는 눈빛 속에서 그런 각오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한시간 쫄딱 비맞고 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갈림길에서 조금 미친 쪽의 길을 선택했구나. 탄탄하고 든든한 방안에서 뛰쳐 나와 야생의 모험을 했구나. 다행히 조난 당하는 일 없이, 한강에 혹 있을지 모를 민물 상어와 아쿠아맨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이 길을 뛰고 있구나. 스스로 칭찬하며 뛰었습니다.


한강에선 열명 남짓의 러너를 만났습니다. 세상에는 약간 미친 인간들이 많다. 꾸역꾸역 흙탕물에 젖은 운동화를 씻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스며든 흙탕물은 안지워 지지만, 한강에서 선탠을 하기 위한 그 노력에 비한다면 우스운 얘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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